관행처럼 이어져오는 인력 동원… 허술한 규정이 ‘언제든 어디로든’ 남용
지난 8월 20일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 공식 SNS 계정에 대민지원 홍보 게시물이 올라왔다. 해당 게시물은 수해복구 현장에 달려가는 장병들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와 대민지원 현장 사진 등 총 10컷의 카드뉴스로 구성됐다. 포스터 제목은 ‘수해복구할 땐 나를 불러줘 어디든지 달려갈게’라는 유행가 가사를 인용했다.

육군 장병들이 수해복구 대민지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게시물 공개 이후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장병들의 노고를 희화화했다”, “군인을 노예처럼 묘사했다”는 비판 글이 잇달아 게시됐다. 결국 국방홍보원은 문제가 된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국방홍보원이 ‘군 장병의 노력과 노고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국방부의 게시물은 왜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까. 무엇이 여론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일까.
자연재해뿐 아니라 감염병 방역에도
포스터 문구처럼 군인은 일이 터지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존재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재난과 같은 국가위기상황에 적극 대응하는 포괄적 안보를 추구한다. 대민지원은 포괄적 안보를 위한 핵심 방안 가운데 하나다. 법적 근거도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재난안전법)’은 중앙대책본부장이 재난 수습을 위해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장에게 필요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해두었고, 국방부는 ‘대민지원활동 업무 훈령’에서 “대민지원을 요청받은 사항에 대해 군 작전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군 장병은 폭설, 태풍, 호우 등 자연재난뿐 아니라 구제역과 조류독감(AI)과 같은 가축질병, 심지어 코로나19 등 사회적 재난 수습에도 투입된다. 최근 5년간(2013~2018년 9월, 육군 기준) 대민지원에 동원된 군 장병은 52만5627명. 농촌일손돕기 등 집계에서 제외된 일반 대민지원까지 포함하면 투입인력 규모는 더 늘어난다. 현재 군 인력은 재난 복구부터 지역 민원까지 사실상 모든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군의 대민지원 규정은 ‘언제든 어디로든’ 인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법적 근거만 마련해두었을 뿐 ‘어떤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군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 규정과 기준을 정하지 않았다. 허가 규정은 있지만 불허 관련 규정은 없는 셈이다. 지난 2006년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군사용어사전(야전교범)>에 게재됐던 군 대민지원 관련 사항은 2016년 신교범의 발간과 함께 삭제됐다. 대민지원은 군사교리에서도 다루지 않는 허술한 영역이다.
허술한 규정 탓에 군 장병의 노동력은 대민지원의 이름으로 악용된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 공사 사업비 절감을 위해 군 병력을 동원했다. 당시 100여명의 병사와 간부 17명으로 구성된 ‘청강부대’를 신설했고, 해당 부대원은 주 6일 하루 10시간씩 4대강 공사에 투입됐다. 사실상 강제노역을 한 것이다.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군 인력을 활용하기도 한다. 지난 2016년 철도파업 당시 정부는 군 인력을 철도 현장에 투입했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재난에 준하는 상태’라며 국방부에 인력 지원을 요청했고, 국방부는 재난 안전법과 국방부 훈령을 근거로 군 인력을 지원했다.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 노조)은 이 같은 군의 대체 인력 투입(대민지원)이 부당하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철도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노조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필수 인력을 유지하며 진행하는 파업은 재난안전법에 규정된 재난 상황으로 볼 수 없다며 군 인력 투입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재난 안전법, 국방부 훈령과 별도로 군 인력 동원과 관련한 근거 법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관련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고, 지난해 철도파업 과정에서 정부는 또다시 군 인력을 투입했다.
야전부대에서는 부대 인근 지역에서 대민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군 인력을 투입하는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 대민지원 기준과 내역을 살펴보면 부대별·시기별·지역별로 제각각이다.

구제역 살처분 작업에 투입된 장병이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 거미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 김선현 차의과학대 교수 제공
현장 지휘관의 판단 따라 결정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감곡면 일대는 지난 8월 초 폭우로 대규모 수해를 입은 지역이다. 이후 인근 군부대에서는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수해복구 작업을 벌여왔는데 지난 8월 20일 전후로 군 대민지원은 모두 중단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충북 전역이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에 접어들면서 군 대민지원을 잠정 중단한 것이다. 감곡면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우려가 커진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도 군부대에 지원 요청을 하지 않고 있다”며 “군에서도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반면 전북 남원시는 군 대민지원을 통한 수해복구 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전국이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를 시행 중이던 지난 8월 31일과 9월 1일에도 육군 7733부대 장병들이 수해복구 작업을 벌였다. 남원시 측은 “남원시는 코로나19 확산세가 미미하기 때문에 수해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외부 인력 지원 없이 남원지역 군부대 인력만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감염 우려는 크지 않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군 대민지원의 적정 작업 범위는 어디까지로 봐야 할까. 지난해 4월 강원도 동해안 일대 산불이 발생하자 군 헬기 20여대, 장병 6800여명이 산불 피해지역에서 피해복구 작업을 벌였다. 강원도 산불은 군 대민지원이 필요한 재난 상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군 장병들은 길바닥과 트럭에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도 복구작업에 임했다.
군 대민지원은 장기화됐다. 산불이 모두 진화된 뒤에도 군 인력은 현장에 투입됐다. 산불 발생 4개월이 지난 지난해 8월에도 강원도 고성군 일대에서는 군 대민지원이 이어졌다. 당시 대민지원에 나온 병력은 구호물자인 옷가지 분류 작업에 투입됐다. 당시 군 대민지원 연구를 위해 해당 지역을 방문했던 송재익 한양대 융합국방학과 교수(예비역 대령)는 “도대체 왜 대민지원을 하러 온 군인들이 이런 작업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며 “사단 군수참모에게 물어보니 ‘지자체에서 요청한 사항이 있어 대민지원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지자체에서 예산을 들여 해야 할 작업을 군인들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대민지원에 투입됐던 군인은 어떤 보상을 받을까. 강도 높은 노동에 따른 휴식과 포상이 보장될까. 휴일을 반납하고 대민지원을 했더라도 장병에게 돌아오는 별도의 수당과 혜택은 없다. 대민지원 관련 보상 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대민지원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상과 후유증은 오롯이 장병 몫이다.
지난 2011년 전국 19개 시·군을 휩쓴 구제역 사태 때도 군 인력 33만8천명이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돼지 등 가축 350만마리가 땅에 묻혔는데 살처분 작업에는 군 장병들도 동원됐다. 경험 없는 20대 초반 군인들에게 살처분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일부 장병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살처분 투입 장병 심리 치료를 했던 김선현 차의과학대 미술치료학과 교수는 “장기간 살처분 작업에 투입된 병사들은 가축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며 “일반적으로 불안과 우울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우에는 노동 강도를 조절하고 미술치료 등 심리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따로 없어
하지만 군에는 사후관리 시스템이 없다. 대민지원 과정에서 장병이 부상을 입을 경우 법과 훈령을 근거로 치료 및 보상을 받도록 돼 있지만 피해 입증 절차가 까다롭다. 피해 입증을 하더라도 받을 수 있는 치료와 보상은 최소한의 수준에 그친다.(군 대민지원 분야 및 적정 범위 연구 2019) 2011년 살처분에 참여한 군인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부대에서 기상 시간을 늘려줬을 뿐 그 외 지원은 없었다”고 답했다.(가축 살처분 트라우마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17)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군의 인력 투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지난 2010년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구제역 현장에 군을 투입할 것을 국방부에 요구했다. 당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2010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군에 살처분과 매몰 작업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국방부 장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의 말처럼 당초 국방부는 대대적인 군 인력 투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군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이 반대하면서 ‘소극적 지원’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국방부 대신 부모들이 장병들 보호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권자의 ‘표’가 필요한 정치인들은 군 대민지원을 지역 민원 해소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국방개혁 2.0’을 통해 2021년까지 전군의 제초와 청소 작업 등 장병 사역 임무의 민간 위탁을 추진하는 국방부는 정작 ‘주먹구구’ 대민지원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뒷전이다.
대민지원에 대한 여론의 분노에는 제값을 받지 못하는 군인의 열악한 노동 환경도 자리 잡고 있다. 2020년 기준 이병의 월급은 40만8000원, 병장의 월급은 54만900원이다. 올해 최저임금 8590원으로 계산한 월급은 179만원(하루 8시간 노동 기준)으로 군인 월급은 최저임금 월급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군인은 노동을 하지만 최저임금은 물론 기본적인 노동 3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현재 군의 대민지원은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국제노동기구(ILO)협약 위반 소지가 있다”며 “군인을 값싼 도구처럼 쓰면서 헌신과 미담으로 포장해 홍보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