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이어 증강현실·융합현실까지… 상용화 가능 수준으로
# 기러기 아빠가 홀로 집에서 식사를 한다. 밥솥에 쌀을 넣고 밥을 짓기 시작하자 외국에 있는 부인의 스마트폰에 ‘취사가 시작됐다’는 메시지가 뜬다. 이를 엄마와 함께 확인한 아이들이 앱을 통해 메시지를 녹음한다. 밥이 완성되자 알람이 울리며 밥솥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멀리서 한국에 있는 아빠에게 ‘맛있게 드세요’라고 식사 인사를 전한다.
# 마스크팩을 얼굴에 붙이고 1분이 조금 넘게 지나자 파란색이었던 원래 색깔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스마트폰으로 이 색깔을 찍어 앱에 저장한다. 현재 피부의 산성화(ph) 정도가 자동으로 분석돼 쓰기 적당한 마스크팩이 추천제품으로 뜬다. 주기적으로 입력한 정보는 계속 누적돼 고객의 피부상태를 알아보는 자료가 된다. 평소보다 거친 피부 측정이 나오면 앱에서 푸쉬 메시지를 보내 마스크팩을 권한다.
쿠쿠전자가 개발한 새로운 밥솥 ‘하트풀 쿠쿠(Heartful Cuckoo)’와 화장품업체 메디힐의 ‘스킨스캐닝 마스크팩’에 대한 광고 내용이다. 쿠쿠전자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 ‘4STEC’와 실시간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밥솥을, 메디힐은 양배추 성분으로 산성도를 알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크로마흐’와 피부 진단 마스크팩을 만들었다.
이들 제품은 광고회사인 대홍기획이 11월 22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한 ‘이노베이티브 & 크리에이티브 쇼(Innovative & Creative Show·ICS)’에서 소개됐다. 기존 제품에 대한 마케팅이나 광고만 하던 데서 고객사에 시장에 먹힐 만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제한하는 것이 요즘 광고사들의 주요한 과제다. 특히 빠르게 등장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어떻게 접목해 현실로 구현하는지가 관건이 됐다. 앞서 두 사례 역시 대홍기획 측이 제조사에 제안한 것들이다.

밥을 짓기 시작하면 스마트폰 앱을 통해 알려주는 쿠쿠전자의 스마트 밥솥./대홍기획 제공
새로운 기술 접목, 현실 구현 여부가 관건
이날 쇼에서 국내외 광고·마케팅 관계자들이 주목한 부문 역시 융합현실(MR)과 사물인터넷, 바이오테크 등 디지털 솔루션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마케팅 기술들이었다. 박선미 대홍기획 크리에이티브솔루션본부장은 “이 같은 시도들이 10년 내 모바일 광고를 뛰어넘는 중요한 프로모션의 영역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광고회사는 광고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새 체널을 만들기 위한 제품을 제안하고, 디지털과 신소재를 접목해 마케팅 영역을 넓혀갈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판을 흔들고 있는 분야는 가상현실(VR)이다. 언제, 어디서나 소비자가 제품을 보고, 만지고, 사용해볼 수 있는 가상체험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기술은 이미 많은 프로모션에 도입됐다. 소주 제품인 ‘좋은데이’는 배우 박보영이 술집에서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360도 VR기법으로 촬영해 주목을 끌었다. 영상으로 배우와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는 느낌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내놨던 360도 VR광고는 마음 속으로 ‘짝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한 남성이 거리를 걸을 때 스치는 모습과 주변의 풍경,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제일기획은 삼성전자와 VR체험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많은 사람 앞에 선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비피어리스(#BeFearless)’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발표할 때 불안감이 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가 평가받으면서 영국 런던에서 열린 ‘러비 어워즈’ 4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상식에서 제일기획의 독일법인은 6개의 상을 받아 ‘올해의 광고회사’로 뽑혔는데, 당시 수상작은 모두 VR기술을 활용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전 세계 VR시장 규모가 올해 67억 달러(7조4000억원)에서 2020년 700억 달러(약 77조5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 역시 1조4000억원에서 5조7000억원까지 늘어나 내년이면 완전한 ‘대세’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삼성전자가 시각장애 수영선수를 위해 선보인 수영모자에 진동 센서가 달린 ‘블라인드 캡’./삼성전자 제공
이에 따라 국내 광고사인 이노션은 VR마케팅을 전담할 ‘비즈니스큐레이션팀’을 신설한 데 이어 최근 페이스북코리아와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360도 동영상과 VR 등 광고 형태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기로 했다. 소셜미디어(SNS) 광고시장에서도 VR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대홍기획의 ICS에서 소개된 사례를 보면 VR뿐 아니라 다른 기술들도 실제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구현돼 있다. 증강현실(AR)과 융합현실 등 5~10년 내 모바일 광고를 대체할 것으로 점쳐지는 이들 기술을 접목한 마케팅은 단순히 기업과 제품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감성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특별한 체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돼 있다. 또 고객들이 적극적으로 프로모션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AR·MR, 5~10년 내 모바일 광고 대체할 듯
세븐일레븐이 감정인식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 ‘더다프트랩’과 개발한 ‘웃음 포인트’는 계산을 할 때 크게 웃는 손님에게 적립금을 쌓아주는 제도다. 계산대 앞에 놓인 단말기에서 웃는 고객의 눈모양과 입꼬리를 인식해서 웃음의 크기만큼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얼마나 즐거운지, 얼마나 활짝 웃는지를 수치화하는 기술을 차용한 것인데, 편의점의 감정노동자인 아르바이트생과 점주들이 소비자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한 번이라도 웃어보자는 취지로 만든 캠페인이다. 롯데월드몰이 ‘코아소프트’와 만든 ‘월드몬고’는 ‘포켓몬고’와 같이 초대형 복합몰 안에서 증강현실을 이용해 할인쿠폰을 찾거나 도망가는 캐릭터를 잡아 사은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삼성전자는 ‘기어 S2’를 내놓으면서 시각장애 수영선수가 제품을 활용해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진동센서가 탑재된 수영모자를 개발한 ‘블라인드 캡(Blind Cap)’ 캠페인은 감독이 회전 시점에 신호를 보내주면 수영모에서 진동이 울려 선수가 바로 회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실제로 스페인 패럴림픽 수영 대표팀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거쳤고, 기록 개선에도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광고와 마케팅 속으로 들어가는 기술들은 아직은 실험 단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내년쯤이면 상업적인 이용이 크게 늘어 소비자들도 일상적으로 접하는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상진 대홍기획 디지털마케팅본부장은 “광고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마케팅과 온라인, 모바일 등 기존에는 구분돼 있던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국내 광고는 연간 10조원 규모다. 이 가운데 모바일이 3조원, PC가 1조7000억원, 지상파 광고가 2조원 수준이다. 그러나 이같이 영역별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기술이 섞이고 마케팅이나 프로모션이 이뤄지는 기기도 한 가지로 정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김 본부장은 “비광고 영역을 늘려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광고뿐 아니라 다른 산업군이 마케팅이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영역과 융합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미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omi8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