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땅도 감응하는 각하…” 박정희가 되살아나고 있다. 친일ㆍ유신ㆍ반공ㆍ독재의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단순한 향수를 넘어 ‘세상을 굽어 살피시는 분’으로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들의 이상이 구체적 인물로 현신한 것이다.
“각하! 무지한 인간들의 생떼와는 상관없이, …따님의 국정 지지율이 60%를 넘었습니다. 각하의 철학과 비전에 하늘도 땅도 감응하고 있음입니다.”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추도사를 읊는 중간중간 “옳소!”와 같은 추임새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엄숙한 추도식 자리가 아니었다면 박수소리가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지난 10월 26일 국립현충원 박정희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4주기 추도식은 쉴새없이 ‘각하’를 부르는 추도사와 추모객들의 열렬한 호응이 뒤섞여 진행됐다.
추도식에 수천 명 몰려들어 눈물
추도식이 진행되는 동안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추모객들 가운데 일부는 식이 끝나고 곧장 이어진 묘역 참배 순서에서 감정을 터뜨리기도 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엄숙해져 있던 추모객들의 표정은 봉분 바로 앞에 다다르자 이내 눈물을 쏟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작년에 따님(박근혜 대통령)이 추도식에 왔을 때만 해도 (선거 전이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올해는 대통령이 됐으니 각하께서 얼마나 든든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울컥했다.” 추모객 이진숙씨(59)에게 박 전 대통령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분’과 같았다. “각하와 육 여사님께서 따님 잘 돌봐주시고 우리나라가 모쪼록 더 잘 살게 도와주세요.”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월 26일부터 박 전 대통령 탄생일인 11월 14일까지의 기간은 박 전 대통령 추모·계승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때다. 5·16혁명에서 1988년 쿠데타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후 숨죽여 왔던 박 전 대통령의 추종세력은 1997년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조갑제씨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 전 대통령 일대기를 출간한 것을 기화로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단순히 ‘박정희 향수’로 인식되던 추모 움직임은 기념관 건립 등 대규모 사업과 함께 ‘신격화’의 의혹을 받게 됐다. ‘박정희교’의 적자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은 어떤 새로운 흐름을 만들까.
‘따님’인 박 대통령은 이날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있던 지난해 33주기 추도식에는 참석한 바 있다. 당시 1만2000여명의 추모객이 몰렸던 데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이날도 박 전 대통령 묘역 주변 도로는 5000여명의 추모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추모객들의 긴 참배 행렬이 끝나는 지점 뒤로는 주차된 관광버스가 현충원 정문까지 늘어서 있었다. 버스 앞유리에 붙어 있는 단체명은 각양각색이었지만 지역은 영남지역이 압도적이었다. 부산·대구·울산 등 광역시를 비롯해 경남·북의 전체 시·군 중에서 빠진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추모객들의 대화 역시 대부분이 영남 말씨였다.
“따님께서 대통령 안 됐으면 종북 빨갱이들 등쌀에 여기 오지도 못했을 수 있다”며 한 추모객이 운을 띄우자 주변에서 “맞다, 맞아” 하며 동의하는 말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에 관한 의견을 묻는 질문을 던지자 질문을 받은 추모객 외에도 주변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설사 (국정원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겨우 당선됐다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다행인 거다. 이름만 야당이라면서 간첩질한 놈들 줄줄이 나오는 것 보면 모르나.” ‘종북’ 세력과 맞선 박 대통령 부녀를 칭송하는 분위기는 뜨거웠다.
박 전 대통령의 ‘신격화’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종교학의 개념을 도입하면 박 대통령 당선 이후의 추모 움직임을 이해할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를 통해 유명해진 ‘현현’ 개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신의 반열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이 현세에 드러낸 모습이다.
각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끝에 드러나는 순수한 절대 존재는 신앙을 통해 경험된다. 박정희교의 믿음 안에서는 ‘종북’의 부정과 ‘유신’과 ‘근대화’라는 이상향의 추구가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구체적 인물로 현신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경향은 기성 종교 안으로도 흡수될 수 있다. 하루 전인 10월 25일에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나들목교회에서 개신교계 최초로 박 전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렸다. 추모예배가 열린 당일만 해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예배 내용은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가 예배 실황을 인터넷에 게재하면서 교계 안팎의 큰 관심을 모았다.
전면 십자가가 걸려 있던 곳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에 대해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 우상숭배라며 분개한 것은 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신비주의 전통은 기성 종교의 체계를 흔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신교ㆍ불교 지도자들 앞장
추모예배에서 성경 봉독과 설교, 찬송 등에 할애한 시간은 30분 남짓으로 짧았다. 대신 이후 대부분의 시간은 주최측이 “박정희 대통령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재발견”이라고 밝힌 순서에 집중됐다. 박 전 대통령이 한국교회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소개하고, 추모헌시와 추모사가 이어졌다. “한국은 독재를 해야 돼!” 김영진 부천 원미동교회 원로목사의 발언에 참석한 신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교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말이 된다. 이 발언은 당시 추모예배에 참석한 목회자마저도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추모예배 참석 교회의 교직자 ㄱ씨는 당시 예배 분위기를 전하며 “예상과는 달리 너무 노골적인 말이 난무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부르며 귀를 닫는 수밖에 없었다”며 “외부에 크게 알려져선 안 될 텐데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고 말했다.
추모예배의 문제는 행사와 무관한 교회들 이름까지 끌어들인 데서도 발견됐다. 박 전 대통령이 유년 시절 출석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미 상모교회 등은 추모예배준비위원회가 일방적으로 해당 교회의 동의 없이 교회명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준비위측은 오는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의 탄생일에 추모예배를 다시 열 것을 공언하기도 해 개신교계 내부에서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ㄱ씨는 “역사적인 인물을 추모하는 예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대놓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인지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면서 “박 전 대통령 탄생일을 맞아 열리는 추모예배는 개인적으로나 개별 교회 차원에서 불참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계 전체가 나서서 막아야 더 큰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 혈세로 신격화 작업
개신교계의 박 전 대통령 추모행사가 관심을 모았지만 박 전 대통령 추모사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불교계였다. 지난 10월 12일 경주 불국사에서 열린 신라불교 영산대재에서 전면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신격화 흐름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를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은 신라불교의 위인들과 함께 숭모의 대상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이 생전 불교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실 때문에 그동안 불교계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추모법회를 열거나 개별 사찰 단위로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특히 지역의 중형 사찰들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추모법회는 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로 당선축하 법회를 겸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박 전 대통령 ‘신격화’의 아킬레스건은 현실의 종교처럼 재원의 조달 문제다.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탄신기념 행사로 생가 일대에서 열리는 탄신제를 비롯,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리는 미술·서예 행사 정수대전까지 매해 경북 구미시의 예산지원이 들어간다.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구미시의 경우 2015년까지 286억원(도비 18억원, 시비 268억원)이 들어가는 박 전 대통령 생가 주변 기념공원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이전까지 박 전 대통령 동상이 구미 시내에서는 구미초등학교 한 곳에만 있던 데 더해서 2011년 높이 5m의 대형 동상이 새로 세워졌다. 대선 직전인 지난해 12월에는 민족중흥관이란 이름의 박 전 대통령 홍보관이 들어섰고, 현재는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건설이라는 명목으로 초가들이 들어선 공원 및 추모관 건립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새마을운동의 이름을 내건 기념관 건설사업은 이미 같은 도내 포항시와 청도군에서 시행된 바 있어 중복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여 혈세를 낭비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포항시와 청도군이 각각 새마을운동의 ‘원조’ 발상지임을 주장하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건립에 나선 데다, 구미시의 새마을운동 공원 역시 같은 성격으로 조성되고 있어 차별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세 곳의 지자체에서 벌이는 새마을운동 관련사업에만 모두 국비 462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강원도 철원군의 경우 갈말읍 군탄리에 있는 군탄공원의 명칭을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으로 개칭했다. 이 공원은 1963년 당시 박정희 육군대장의 전역식이 치러진 장소로, 1969년 육군 5군단이 기념비를 세운 데 이어 1976년 강원도가 기념비 일대 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해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이라 이름 붙인 곳이다.
박 전 대통령 사후 5·16의 쿠데타 인정과 함께 1988년 지역 이름을 따 군탄공원으로 개칭돼 불려 왔다. 그러나 지난 3월 철원군 지명위원회가 지역 내 여론의 변화를 이유로 들며 처음의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철원군 역시 공원의 이름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예산을 들여 공원 확대사업을 시행할 방침이다.
이 확대사업은 국토해양부가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8억8000만원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전체 30억원대의 규모로 실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박정희교의 본산 영남지역과 달리 철원군은 군내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이 사업에서도 ‘각하의 철학과 비전’이 감응할 수 있을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