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긴급출동 SOS 24’보조작가 죽음… 열악한 방송 현실 보여줘

방송국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제작진의 모습이 숨어 있다. 특히 박봉과 쉴틈없는 환경 속에서도 방송을 위해 울고 웃는 작가들의 희생 없이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경향신문>

장면 하나. 2007년 11월 4일부터 미국작가협회가 판권 지분을 두고 제작자와 마찰을 빚었고, 작가들은 끝내 파업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일어난 파업은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이 거센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레이 아나토미’ ‘히어로즈’ ‘프리즌 브레이크’ ‘로스트’ ‘CSI 마이애미’ ‘CSI 뉴욕’ 등 한국에서 방송되던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메우기 시작한 것. 유명 배우까지 파업에 동조하면서 작가협회의 파업은 14주간이나 계속됐다. 판권 지분을 높이고, 작가의 최저 원고료를 3~3.5% 인상하는 것으로 미국작가협회의 파업은 마무리됐다.

장면 둘. 지난 8월 28일 새벽 2시 39분, 목동 SBS 사옥 23층 옥상에서 SBS ‘긴급출동 SOS 24’에서 일하던 20대 초반의 보조작가 김모씨가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사건을 조사 중인 양천경찰서 관계자는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해당 프로그램 게시판에는 “남들을 구제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식구부터 챙겨라”라는 비판의 글이 쏟아졌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탓이다"
미국와 한국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례는 방송작가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지 알게 한 계기였다. 미국에서는 배우와 작가가 힘을 합쳐서 작가의 상황을 개선했지만, 한국에서는 보조작가의 죽음 이후에도 “작가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수많은 말만 오갈 뿐 구체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없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는 보통 3단계로 나뉜다. 일을 처음 시작하는 ‘보조작가’(작가들은 흔히 ‘막내작가’로 부른다)와 프로그램의 꼭지를 만들기 시작하는 ‘서브작가’, 프로그램의 전부를 책임지는 ‘메인작가’로 나뉜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코너를 만들기 시작하는 서브작가 때부터다.

보조작가는 일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섭외’ ‘테이프 프리뷰’ ‘자료 조사’ 등을 맡는다. 일의 업무도 뚜렷하게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시때때 처리해야 할 일도 많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기획회의에 참여하려면 아이디어도 짜내야 한다. 1주일에 보통 6일을 일하지만, 주말이라고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방송을 앞두고는 집에 갈 틈도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 1주일에 일하는 날이 6일이 기본이고, 쉬는 날에도 부지기수로 사무실에 나가야 한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 잠깐 잠을 자고, 다시 사무실로 나가는 삶의 반복이다. 보조작가는 그렇게 일하고 보통 70만~8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방송사나 외주 제작사의 상황에 따라 100만 원 이상을 받는 곳도 있다. 그렇게 보조작가는 화려한 방송 뒤에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1년 정도 일을 배워야 프로그램의 꼭지를 만드는 서브작가로 입봉할 수 있다. 예능과 교양 할 것 없이 보조작가는 비슷하게 생활한다. 방송일을 한 지 3년 된 한 작가는 “막내 때는 다 힘든데, 특히 테이프 프리뷰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면서 “나도 60분짜리 테이프 44개를 이틀 밤을 새워서 프리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전했다. 산술적으로 테이프 44개를 다 보려면 44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선택한 김모 작가가 생활했던 제작 환경은 주변 작가 사이에서도 힘들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그 강도가 어떠했을지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서브작가나 메인작가가 됐다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감이 높아지고, PD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최종적인 책임을 PD가 지는 만큼, 아무리 작가가 경험이 많다고 해도 PD의 의견을 묵살할 수도 없다. 방송 일을 시작한 지 9년째인 한 작가는 “음식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촬영만 나갔다 오면 불만인 PD가 있었다”면서 “현장에 한 번 따라가보니, 촬영 감독에게 현장을 맡겨놓고 PD가 조미료를 갖다주는 AD 역할을 하고 있더라”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음식 프로그램을 만드는 노하우가 없어 PD가 연출을 하지 못하고 잔심부름만 하고 있는 상황인 것. 보통 PD는 깡통 하나만 가지고도 화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떨어지는 PD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작가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작가들에게 방송 제작 현장은 욕과 눈물이 난무하는 전쟁터인 것이다.

방송작가협회 회원 2000여 명

SBS에서 방송한 드라마 ‘온에어’는 드라마 한 편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제작진의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줘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드라마에서 송윤아는 드라마 작가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 SBS 제공

메인작가라고 해도 PD의 눈치를 볼 때가 있다. 작가의 목숨(계약)을 PD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공채 작가가 사라진 요즘, 모든 작가는 계약과 재계약으로 생사가 결정된다. 아무리 연차가 높고 노하우가 많은 메인작가라고 할지라도 PD와 관계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연차가 높은 작가는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PD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작업의 선도 확실하게 그어놓는다. PD가 해야 할 일을 작가에게 밀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방송을 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한 작가는 “이제는 PD와 싸우는 것도 지친다”면서 “요즘은 프로그램을 할 때 PD가 누구인지부터 살피게 된다”고 토로했다. 4대 보험이 안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점도 있다. 보험으로 수십만 원씩 빠져나간다는 샐러리맨의 이야기를 들으면 차라리 4대 보험에 들지 않은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선·후배 작가들은 보조작가의 죽음으로 가슴에 큰 생채기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차라리 사표를 쓰고 다른 일을 하지 왜 죽었냐”는 선배 작가의 타박이나, “그 작가가 힘들었을 때 보듬어줄 동료만 있었어도…”라는 아쉬움도 작가가 처한 상황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안타까움의 표시다.

왜 방송작가들은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2000여 명이 넘는 작가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는 막내 작가의 죽음 이후에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협회의 게시판에는 “이렇게 조용한 것은 무슨 뜻인가요” “방송작가협회는 왜 있는 겁니까” 등 작가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 방송작가는 방송작가협회 게시판에 “후배는 선배들이 바꿔주길 바란다. 사실 선배들이 바꿔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선배들은 무섭고 짜증나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올라온 자린데, 어느 누가 쉽게 자기 밥그릇을 차버릴 수 있느냐는 자조일 것이다. 서글프지만 방송작가의 현실을 한 보조작가는 죽음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래도 후배 작가가 남기고 간 생채기를 치유하고 싶고, 방송의 현장을 바꿔야 한다면, 그리고 바꾸고 싶다면 그 몫은 작가 자신일 것이다. 대부분 시청자는 방송에 나오는 화려하고 의미 있는 화면만 볼 뿐이지, 그 안에 숨은 서글픈 현실까지 알아채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