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957호

ㆍ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용

2012년 임진년(壬辰年)은 용의 해다. 용은 십이간지 중 다섯 번째로 다른 짐승과 달리 상상의 동물이다. 우리말로는 미르라 부른다. 임진년은 육십갑자 중 스물다섯 번째 해이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1592년)이 있었다. 항간에는 올해가 용띠 중에서도 흑룡(黑龍)의 해라 하나 근거 없는 이야기다.

2012년 임진년은 용의 해다. 사진은 2008년 중국에서 만든 100여m 길이의 용 형상을 한 등. /연합뉴스

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외의 대상이다. 동양에서는 국가 또는 왕과 동일시되고 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변고가 있을 징조로 보았다. 왕이 입는 옷을 용포(龍袍)라 하며, 왕의 자리를 용상(龍床)이라 부르는 것도 왕의 절대권력을 초자연적인 힘에 빗댄 것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는 대권에 도전하는 인물을 용에 비유하는 일이 흔하니 올 한 해 수많은 새끼용들이 세상에 나타날 터이다. 아마도 정치적 변화가 있기는 할 것 같다.

용은 주변과 조화하는 존재
용은 주로 비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용이 승천할 때 비를 뿌리거나 용을 무찌르면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막스 베버와 같은 종교학자는 하늘에서 대지를 뒤덮고 번개와 비를 뿌리는 먹구름을 신격화한 것이 용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비와 관련 있는 용을 선한 존재로 받들고, 목축사회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설명했다. 용의 조화로 쏟아져내리는 비는 고맙거나, 폭우로 모든 것을 쓸어가는 하늘의 징벌과 재앙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용이 특별한 태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변하여 용이 된다고 보았다. 소위 변룡설(變龍說)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되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용의 크기도 일정치 않아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과 같으나 능히 천지를 뒤덮는 거대한 크기를 지녔다고 했다. 결국 용이란 정해진 무엇인가가 아니라 주변과 조화하는 변화의 존재를 뜻한다.

용의 종류도 많았다. 이무기의 일종인 훼룡이 500년을 살면 교룡(蛟龍)이 된다 하였고, 교룡은 곧 뱀의 새끼라 한다. 교룡이란 말의 다른 의미는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호걸을 뜻하니, 제 아무리 출중한 인물이라 해도 자신의 때를 만들지 못하면 한낱 뿔 달린 뱀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이 있다. 교룡과 비슷하게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물속에 숨어있는 용을 잠룡(潛龍)이라 부른다. 잠룡이 승천하지 못하면 자연의 균형을 깨고 패악을 부리는 일도 종종 있다. 때를 노려 땅 속에 숨어 있는 용은 반룡(蟠龍)으로, 몸을 똬리 튼 채 세상에 엎드려 있는 모양새다. 올 한 해 우리는 정치판에서 수많은 교룡과 잠룡, 그리고 반룡들을 보게 될 것이다. 승천하면 세상에 이로운 비를 뿌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독을 뿜어 세상을 어지럽힐지도 모를 일이다.

용의 암컷을 이룡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룡은 붉은 색 호랑이 형상에 비늘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용들과 달리 자연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밖에도 물길을 다스리는 지룡(地龍), 하늘을 날며 비를 뿌리는 비룡(飛龍)과 응룡(應龍)이 있고, 색깔에 따라 황룡·청룡·흑룡 등이 있으며, 성질에 따라 싸우기 좋아하는 석룡, 불을 뿜는 화룡과 울음소리를 잘 내는 명룡도 있다. 별의 별 용이 다 있다.

서양에서 용은 대체로 악마의 화신으로 간주됐다. 사진은 영화 <드래곤 하트>의 한 장면. /스포츠경향

서양에서는 대체로 용의 일족인 드래곤을 악한 존재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드래곤이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뱀이나 고래, 악어와 같이 덩치가 큰 동물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후에 기독교에서 악마를 일컫는 말 중의 하나로 드래곤을 칭하여 악의 화신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사장 미카엘은 드래곤과 싸우고, 중세의 기사들은 어둠의 기운인 그와 맞섰다고 표현했다. 드래곤의 피를 바르면 불사의 힘을 얻고, 비늘로 갑옷을 만들면 어떠한 창과 칼로도 뚫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야기에 따라 불멸을 향한 인간의 사악한 의지를 드래곤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인간의 이해를 넘는 신비의 상징
용에 대한 신비는 종종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주로 판타지 작품 속에서 나타나 인간과는 애증의 관계로 묘사된다. 최근 들어 드래곤 캐스트, 미르 등의 게임에서 드래곤은 중요한 아이템으로 표현되고 있다. 절대적 무기인 갑옷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곳곳의 드래곤을 물리치고 비늘을 얻어야 한다. 과거 광야에서 용과 싸우던 기사들이 이제는 게임의 환상 속에서 드래곤과 맞서고 성장해가는 것이다.

용은 과연 실재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각양각색이다.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주장과 함께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설도 있고, 구체적인 사냥법까지 전해져 온다. 한약재로서 용골(龍骨), 즉 용의 뼈도 있다. 용골은 땅에서 캔 것이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대체품으로 소뼈를 태워 쓰기도 한다. 1899년 중국 베이징의 한약방에서 용골을 산 류악이란 자는 뼈에 새겨진 고문자를 발견하여 갑골문자를 밝혀내기도 하였다. 용골의 주성분은 포유류의 뼈 화석이라 하나, 허난성 일대에서 나는 용골은 공룡의 뼈를 캔 것으로 밝혀졌다. 공룡의 뼈이니 용과 무관치는 않은 것이다.

인간은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자연의 경외와 신비를 마주할 때 종종 신화의 옷을 빌려 표현한다. 용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도 그 이면의 교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띠 태생인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은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남겼다. 봉건적 계급관의 우두머리인 미리(龍)를 혁명적인 투쟁의 존재인 드래곤이 맞서 싸운다는 우화를 담았다. 평등과 계급투쟁의 가치와 봉건적 계급질서의 충돌이 격전을 일으켜 결국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내용이다. 시대적 배경이 다소 다르지만 시민의 자각과 투쟁이 마침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단재의 주장은 지금도 일리가 있다.

대선을 앞둔 올해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용과 용의 대격전 시대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등용문을 지나 용이 되어 승천하고, 누군가는 잠룡과 교룡으로 남아 이루지 못한 꿈의 여한으로 세상을 어지럽힐 수도 있다. 선하고 유익한 용이 승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용문의 주인은 결국 각성된 시민일 것이다.

김천<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