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경향신문>

8월 8일 오전 9시 KBS 본관에 경찰이 진입했다. 사복경찰 40~50명이 이사회가 열리는 본관 3층에 올라와 이사회를 저지하려는 KBS 직원을 밀어냈다. 공영방송사에 경찰이 진입한 것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다.

본관 정문 앞에서는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상임운영위원장 성유보)이 이사회의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허구와 왜곡 투성이의 감사 결과를 토대로 한 감사원 요구를 KBS 이사회가 안건으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열렸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인 남윤인순 이사는 “이사회를 여는 데 청원경찰에 사복경찰까지 동원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공영방송 역사상 경찰력을 동원한 상태에서 이사회를 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다”라고 발언한 후 이사회장을 떴났다.

유재천 이사장은 “이사들이 들어오는 데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경찰 동원은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 이사장과 친여권 이사 6명은 신속하게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 제청안을 가결했다. 경찰력을 동원해 직원의 반대를 저지하고 사장 해임 이사회를 주도한 유재천 KBS 이사장. 그는 누구인가.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 멤버
그는 1938년 함경북도 영흥 출신이다. 1961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매스컴 석사학위를 받은 유 이사장은 1964년 한국신문연구소 연구원으로 학문을 시작한 언론학자다. 1973년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에서 1974년 서강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다음 사회과학대학장까지 했다. 1996년 방송위원회 위원·부위원장을 하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림대 부총장을 했으며 한림대 한림과학원 원장(2003~2005), 상남언론재단 이사(1995~현재)로 재직 중이다.

유 이사장은 언론계, 적어도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인사로 통했다. 지금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1995년 9월 22일 당시 공영방송발전연구위원회위원장이던 그는 정부의 방송 계획에 대해 “방송의 독립성·자율성을 보장할 장치가 미흡하고, 방송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어떻게 얼마나 축소되는지에 대한 제시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통합방송위의 위상에 대해 “정부의 어느 부처에도 소속되지 않고 스스로 준사법권, 준행정권, 준입법권을 행사하는 자족적·독립적 행정위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방송통신위원회의 행태와 관련해 그대로 인용해도 적절한 지적이다.

유 이사장은 또 1998년 8월 경실련·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민노총 등 노동단체, 언론노련, 기자협회 등 개혁적인 언론단체가 망라된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 창립 멤버다. 언개연은 이번 정연주 사장 사퇴 반대를 주도한 언론시민단체로 유 이사장은 과거 자신이 창립한 언론단체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98년 4월 우리방송문화지키기시민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공동대표는 이형모 언론노련 위원장, 김상근 시청자연대 상임대표, 지은희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등이고, 함께했던 사람은 권영길 현 민주노동당 의원, 시인 김지하씨, 이효재 정신대문제대책위 대표 등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다.

KBS·MBC 보도에 비판적 시각
젊은 시절엔 언론 자유와 방송 민주화에 소신을 가진 진보학자로 통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한국언론과 언론문화’(나남, 1986)에서 “방송의 운영이나 편성은 정부나 기타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1997년부터 2003년 초까지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지냈다.

KBS이사회가 열린 8일 서울 여의도 KBS 본사 로비에서 KBS 노조원들과 사복경찰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또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회의 정책위 산하에 설치한 ‘방송산업 활성화 정책 기획단’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학자면서 진보적 정치권과 깊숙이 인연을 맺기도 했다.

특히 1999년 8월 9일 유 이사장은 ‘민주적 방송법의 조속한 제정을 바라는 언론학 교수 일동’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90명의 언론학자가 서명하고 “한국방송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로 시작하는 이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정치 논리에 의해 왜곡되었던 방송을 국민의 품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채… 국민들은 공정한 보도, 수준 높은 프로그램,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방송을 원하고 있습니다. …… 기나긴 세월 동안 정부는 방송을 직접 통제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왔습니다. 정부의 방송 독점이 많은 문제점을 파생시키는 결과, 정부의 방송통제권이 독립된 규제기구로 넘어가야 한다는 데 대다수 학자와 시청자 단체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방송정책권이 정부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면 방송의 독립성 확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방송정책권의 정부 존치를 주장하는 일부의 주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송은 국민의 것입니다.”

하지만 유 이사장은 보수적인 뉴라이트계열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변신’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 11월 ‘공영방송 발전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공영방송을 비판하는 보수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 함께 행동했던 진보 성향의 언론단체나 노조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노조가 방송을 장악했다는 주장은 물론, 신문법에 위헌 요소가 있다며 2006년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 이사장는 지난해 대선 이후 공개적으로 보수노선을 걸으며 새정부에서 중용될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는 KBS와 MBC의 BBK 보도를 거론하며 “11월 중순 김경준씨의 입국 이후 BBK 의혹이 지나치게 자주 방송에 등장했다”면서 “대선 후보 등록 이후엔 심각할 정도로 편파적인 방송이 나갔다”고 주장했다. 올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는 “10년간 KBS와 MBC가 편파방송을 일삼으며 공영방송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면서 “시대정신을 앞세워 정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을 정치 교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권이 바뀌자 전임 김금수 이사장은 중도 사퇴해야 했고 유 이사장이 KBS 새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는 경찰력을 동원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 정연주 KBS 사장의 해임제청안을 가결하는 의사봉을 두드렸다. 올해 71세로 고희인 그는 크게 ‘한건’한 것이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